최건수 <작가 인터뷰: 한국사진의 뉴프론티어>: 미술시대 2006년 11월호

<미술시대 2006년 11월호>

한국사진의 뉴프론티어, 최건수의 사진 토크, 이주형

최건수 | 사진평론

Q.최건수 : 영화. 사진. 회화는 표면적으로 매우 비슷해 보이나 영화와 사진이 이미지의 민주화 측면에서는 회화에 비해서 진전된 매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회화가 재현성 외에 다른 미학적 가치를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진과 영화는 정지냐 동적 이미지냐 만 다를 뿐 그 뿌리는 한 뿌리라 할 수 있겠지요. 당신은 영화에서 사진으로 진로를 바꾸었는데, 이미지를 다루는 측면에서 사진과 영화는 당 신에게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A.이주형  : 상업영화 틀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겠지만, 오래전에 앙드레 바쟁이 말했던 것처럼 영화의 근원은 사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두 매체가 가진 차이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느끼는 부분을 언급한다면 사진이 가지는 물성에 관한 것입니다. 영화는 요즘 같으면 DVD로 구입해 소유할 수 있겠지만, 그 자체가 물성을 가지진 않습니다. 영사되거나 플레이되는 동안 환영처럼 스크린이나 모니터 위에 명멸할 뿐인 것이죠. 아무리 근사한 장면이 지나가더라도 영원히 고정시킬 수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이미지 역시 영화 한편을 구축하는 수많은 이미지 중 하나일 뿐인 것입니다. 

   영화 한편을 보고나서는 유독 하나의 장면이 강렬하게 떠오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 사진 이미지와 유사해 보이지만 그 장면은 영화를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사진은 이미지 하나를 통해 그 어떤 전체상을 더듬어가게 됩니다. 일련의 시리즈로서 사진작업이 이루어진다면 보다 구체적이 되겠죠. 그렇더라 하더라도 사진은 결국 영화와는 그 상징화의 측면에서 대척점에 놓이게 되며 빛으로 명멸하는 환영으로서가 아니라 눈앞에 하나의 물건으로서 지속적으로 남아있는 물성의 이미지가 된다는 생각입니다.

   어디에선가 사진은 존재증명임과 동시에 부재증명이라는 언급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진은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매우 모호한 매체라고 생각하며 그 때문에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어떤 매체보다도 현실의 유사상을 재현하지만 현실 그 자체는 아닌 것이죠. 이러한 지점만큼 불가해한 것이 어디 있을까요. 현실과 닮은 그 모습이 전후 맥락도 없이 제시될 때 우리의 지각과 인식은 더듬거리게 됩니다. 이미지들이 집적되어 인과관계를 갖거나 충돌하며 의미화 되는 영화 안의 사진 이미지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Q. 최건수: 다시 영화를 하고 싶은 마음(동적 이미지)은 없습니까? 지금 박사 과정에서 미디어 아트를 공부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신지?

A. 이주형  : 본격적으로 사진을 전공하기 이전 영화를 꿈꾸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파편처럼 기억되는 단서들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일식‘과 같은 영화의 마지막 10여분 이어지는 숨막히는 몽타주이거나 제리 셔츠버그의 ’허수아비‘나 빔 벤더스의 일련의 영화들이 드러내는 로드무비 형식이 지니는 생과 현실에 대한 시선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안토니오니의 경우 그것이 몽타주이건 ’여행자들‘에서 드러나는 긴 롱 테이크이든 대게 그 시선은 생의 부조리와 불가해함을 향하고 있습니다. 제 사진작업에 이러한 경험이 크게 반영된 부분은 없지만 그 어떤 불가해함, 불가지론적인 입장에서 대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의식만큼은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외적으로 발표한 적은 없지만 뉴욕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하는 동안 제가 작업했던 매체는 사진만이 아닙니다. 사진과 함께 비디오 매체를 활용한 작업도 병행했었죠. 다만 그 시기의 비디오 매체가 갖는 기술력과 퀄리티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사진이 갖는 작업의 완결성 있는 마무리와 비교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한 동안 비디오 작업에 손을 대지 않고 있었지만 최근 들어 사진이 갖는 미학적 특징들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의 비디오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숭실대 박사과정의 미디어아트 전공은 이러한 관심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특히 연속된 사진이 갖는 시간성의 문제를 비디오 작업을 통해 풀어보고 싶습니다.

Q. 최건수  : 풍경은 당신이 좋아하는 소재 같군요. 다만 F64 그룹의 풍경처럼 선명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은 아닌 것 같군요. 당신에게 풍경은 무엇입니까?

A. 이주형  : 풍경을 대상으로 삼게 된 계기는 1992년 홍대 대학원 시절 배병우 선생님의 수업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것 같습니다.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의 대상으로서의 풍경이 아닌 다의적이고 모호한 생에 대한 인식에 대한 시각적 은유로서 풍경을 의식하게 된 것이죠. 특히 풍경에 대한 로버트 아담스의 미니멀한 어프로치를 무척 좋아하고 영향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94년의 ‘침묵의 풍경’이라는 첫 개인전은 이러한 관심의 결과입니다. 

기억의 풍경 054, 1999

기억의 풍경 054, 1999

Q. 최건수 : 제가 당신의 사진을 처음 본 것은 99년 갤러리 룩스의 개관 기획전에 나온「Landscape of Memory」시리즈 중 몇 점이었지요. 작품의 구조는 두 점의 사진을 하나로 묶은 딥틱(diptych) 형태로 장난감 사진기(toy camera)를 이용해서 찍은 것 같이 보였습니다. 전경 없이 흐릿하게 영상이 잡혀있고, 두 장의 사진이 격자 형태로 구성 된 것이 달리는 기차에서 뿌연 창문을 통해 밖을 보는 ‘파노라마’ 시각을 보는 느낌이었지요. 그것을 당신은 ‘기억’이라는 단어로 갈무리 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보는 저로서는 ‘데 자뷰’ 느낌이 들었고..,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이 필요 할 것 같습니다. 왜 그것이 딥틱이어야 하는지, 왜 toy camera를 써야했는지, 파노라마 시각은 당신에게 어떤 것인지 등...  

A. 이주형  : 앞서 언급했듯이 그것이 자연이건 도시이건 대개 제 작업은 풍경이라고 하는 장르적인 시각적 특징을 갖습니다. 하지만 현실 대상을 표상하거나 명시하는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현실의 장소성이 지워진 익명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억의 풍경’ 시리즈의 작업 계기는 뉴욕근대미술관 MOMA 의 19세기 사진 콜렉션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퇴색되어 가는 사진들의 표면이 드러내는 지난 시간에 대한 환기가 마치 소멸되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듯이 느껴졌습니다. 우리의 기억이 점점 모호한 형태로 남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오랜 시간이 쌓인 빈티지의 느낌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보려고 했던 한 동안의 노력이 토이 카메라의 사용이나, 딥틱의 구성, 프린트의 표백 같은 테크닉의 사용을 끌어낸 것 같습니다.

자취 211be, 2007

자취 211be, 2007

Q. 최건수: 자연의 한 부분에 인공적 구조물을 삽입 시키고 있는 것(침묵의여행,94 / Landscape of Memory, 99/시간의 끝,2003)에서 영화의 세트장 (Invisible Memory,2004) 이나 지금까지 남아있는 근대건축(Modernscape,2006)같은 건물로 관심이 이동되고 있습니다. 부연하자면 경험 된 자연에서 건축물이 담긴 사회적 풍경으로 관점의 이동이지요. 이러한 풍경에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러나 보통 사람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미세한 역사 아닙니까? 개인적인 것도 마찬가지 경우이지만 당대보다 지나간 시간에 관심을 갖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A. 이주형  : 거시적인 것보다는 미시적이고 디테일한 부분에 관심이 가게 되는 것은 아마도 부여된 성향 탓이 아닐까요. 거대하고 위대한 이야기보다는 사소해 보이는 것들을 통해 은근히 발산되는 낯선 파문 같은 것에 끌리는 편입니다. 마치 음악에서 교향곡이나 관현악곡 보다는 4중주, 3중주 나아가 독주를 즐겨듣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 근대건축에 대한 관심은 아직 확실하게 정리된 상태는 아니지만 그 안에서도 상당히 제한적인 범위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편입니다. 아마도 기준은 근대건축이 드러내는 동시대의 미의식의 발현과 동시에 그 시대의 미세한 상징으로 우리의 역사적 기억을 환기시킬 만한 대상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미세한 역사를 통해서도 충분히 큰 이야기의 흔적을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지나간 시간에 대한 관심은 아마도 생에 대한 집착과 미련이 많아서일까요. 

Q. 최건수: 많은 사진이 핀 홀이나 토이 카메라 등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흐리고, 세피아 혹은 단일 색조를 쓰는 작업(coney island)은 과거나 비현실적 이미지를 드러내고자 하는 전략입니까?

A. 이주형  : 현실감을 지워내어 사진의 모호한 시공간을 강조하려 하는 방법론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로서는 너무 인위적이 아니었나 반성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Q. 최건수: 「Wonderland」를 포함하여 이러한 이미지는 과거에 대한 향수, 기억, 서정성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는 성공적 시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가 너무 미시적이고 개인적 관점에 머물러 사회적 이슈가 될 담론의 생산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보편적인 인간의 내부적 문제에 대한 천착이나 더 큰 이슈가 필요하다고 느끼지는 않는지요?

A. 이주형  :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관점이라는 부분에 동의합니다. 이에 대한 반성이 역사적 기억을 보다 본격적으로 의식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Q. 최건수: 최근의 작업 방향이 근대건축에 쏠려있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이 시대의 건축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A. 이주형  : 지금까지의 작업을 지탱해온 키 워드인, 시간, 기억, 소멸, 익명성에 더하여 그 연장선상에서 미시적일지언정 구체적 담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역사성을 드러낼 수 있는 소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심미적이면서 동시에 역사적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5~60년대의 모더니즘 건축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주체적으로 형성되지 못한 우리의 모던이 지니는 상징으로서 보편적인 미적 대상과 실패한 시대성이 절충되는 소멸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 시대를 시각적으로 표상하는 가장 적절한 현실의 대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Q. 최건수: 작업과 직접 관련 없는 질문 하나를 드리고 끝낼까 합니다. 사진의 발명 이후 사진은 최대의 변혁기를 맞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디지털의 등장이겠고 예술의 영역에서는 매체가 섞이는 하이브리드한 작품이 사진 고유의 영역을 침투해 들어옵니다. 지금은 새로운 관점의 시각적 위상이 요구되는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혼란기에 미술대학에서 사진을 가르치고 계시는 입장에서 어떻게 후배들을 교육하고 계시는지요. 

A. 이주형  : 사진이라는 매체 안에 갇힌 좁은 시야가 아닌 시각예술 및 영상 분야를 아우를 수 있는 폭넓은 시야를 갖도록 유도하는 편입니다. 특히 인문학적인 소양을 강조하는 편이지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